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바쿠닌 (문단 편집) == 개요 == >"바쿠닌 없이도 아나키즘은 존재했겠지만, 아나키즘 운동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Bakunin;The Father of Anarchism』 p.262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피에르조제프 프루동|프루동]]의 뒤를 이어 나타난 [[아나키즘]] 활동가이자 사상가. 프루동은 작은 공동체들의 연맹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의회주의의 역설[* 무정부주의자가 그의 목표를, 정부를 통해 이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프루동은 스스로를 '역설의 인간(a man of paradox)'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을 외쳤던 반면에, 바쿠닌은 그것이 의회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괴를 향한 열정은 창조의 열정"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을 스스로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평생토록 혁명을 쫓아다니며 살았다. 프랑스, 스위스, 폴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떠돌며 사람들을 선동했고 혁명을 주장했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불같은 열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고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냈다. 그의 혁명적 사회주의는 이후 노동자의 총파업을 수단으로 사회를 변혁시켜 나가자는 '혁명적 [[생디칼리슴]]'으로 계승된다.[* 다만 혁명적 [[생디칼리슴]]과 [[아나키즘]]적 [[생디칼리슴]]은 다른 존재다. 바쿠닌은 둘다에 영향을 준 것은 맞지만 둘의 존재는 다르다. 이에 대해서 바담 다미예의 [[https://kr.theanarchistlibrary.org/library/badim-damiye-20segiyi-anakijeumjeog-johabjuyi|20세기 아나키즘적 조합주의]]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당시 [[카를 마르크스]]와 함께 제1 [[인터내셔널]]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혁명가의 두 기둥 중 하나였으나[* 각각 바쿠닌은 무정부주의,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를 대표한다.], 마르크스와는 사상적 견해차이[* 특히 혁명 이후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있어야 되느냐는 문제로, 둘 사이에 의견이 갈렸다. 바쿠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또 다른 권력 기관이나 독재적 국가로 변질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하였고, 마르크스는 혁명의 이념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국가가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로 갈라섰고, [[세르게이 네차예프]] 사건[* 바쿠닌이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려 하자 네차예프가 그런 책을 번역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면 당신을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는데 문제는 바쿠닌은 혁명 조직을 운영하느라 돈이 필요해 출판사에서 번역료를 일부 가불받은 상황이었다. 네차예프는 출판사에게 돈은 바쿠닌에게 기부한 셈치고 번역을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당시까지는 네차예프는 바쿠닌이 운영하던 조직 소속이었기에 제3자가 보기에 해당 행동은 바쿠닌이 자본론을 명목으로 출판사를 삥뜯는 행동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었다.] 등을 이유로 바쿠닌은 마르크스에 의해 인터내셔널에서 내쫒겼다. 이후 아나키즘의 계보는 마르크스적 공산주의에 아나키즘적 요소를 도입한 [[표트르 크로포트킨]]으로 이어진다.[* 크로포트킨의 이러한 사상을 '아나코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크로포트킨의 '아나코 공산주의'적 측면은 바쿠닌을 지나치게 집산주의적이라 비판하는데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임금을 '노동전표'로 주는 '노동에 따른 분배'를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필요에 따른 분배'를 주장하였다. [[https://kr.theanarchistlibrary.org/library/pyoteureu-alregseyebici-keuropoteukin-bbangyi-jaengcwi#toc15|빵의 쟁취]] 13장의 "집산주의적 임금제도" 참조.] [[아나키스트]]로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였던 바쿠닌의 사상은 자유에서 시작하여 자유에서 끝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한 때 '니힐리즘의 창시자'이자 '무정부주의의 사도'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프리드리히 니체]]와 같은 [[허무주의]]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바쿠닌 연구 최고 권위자 [[에드워드 카]]는 바쿠닌을 가르켜 '역사상 가장 완벽한 자유정신의 구현'이라 평가하였다.[* 단, 바쿠닌은 개인의 자유가 집단과 서로 대립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는 집단에서의 상호적 사회연대를 통해서만 확보되고 발전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